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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정신 건강/말씀과 적용

성탄절이 중요한 이유 - 예수님 탄생과 구원의 은혜

by 아이언멘탈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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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온 세상 사람들이 행복함을 기대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연인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즐거움보다 왜 성탄절을 이렇게 기념하며 기대하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기쁜 소식을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 시작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성탄이라는 거대한 사건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4-7

 

1. 멍에를 벗겨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던 멍에를 벗겨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면?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우울하며 끔찍합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속량 하셔서 구원받고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멍에란 무엇인가

멍에를 벗겨주셨다 했는데, 멍에는 무엇입니까? 소의 코를 뚫어 고리를 장착하고 등에 얹어서 밭을 갈 때 쓰는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바로 멍에(yoke)입니다. 사람으로 보면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와 고통, 어려움과 메여있음을 멍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율법이 멍에였던 시대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는 율법의 아래 있던 시대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수십 수백 가지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사람들입니다. 모세 때부터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있던 민족이며 모든 삶이 율법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바로 멍에였습니다. 

율법아래 있던 종교인 바리새인들

율법의 멍에는 인정사정이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99개의 율법을 지켰어도 1개의 율법을 어기면 그 사람은 그냥 율법을 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이 시대 가장의 멍에와는 그 무게감과 속성 자체가 다른 멍에입니다.  

 

은혜의 시대로 전환

율법아래 사는 삶은 매우 어려운 삶입니다. 누구도 율법아래에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00%를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일당 8만 원을 받는 사람에게 매일 세금을 50만 원씩 가져가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세상에서 살게 된다면 너무 고단하고 힘든 삶에 매일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 살기 쉽게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율법이 아닌 은혜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살지 않아도 은혜로 구원이 주어지는 기쁜 소식!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들이 무겁게 멘 율법의 멍에를 꺾어서 은혜의 시대로 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이사야 9:4

어떻게 율법의 멍에를 꺾으셨을까요? 바로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 꺾으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지키지 못하여 죄인이 된 자는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인데 이 율법의 저주를 직접 받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속량 하셨습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 - 소식 vs 충고

율법의 멍에를 꺾으신 예수님의 존재가 일단 다른 종교와는 다름이 있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여러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차이점은 구원받는 방법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멍에를 지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믿으면 되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다양한 '충고'를 필요로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던지 고행으로 자신을 수행하고 도를 닦아 어느 경지에 올라야 한다던지 하는 다양하고 힘든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이 행해져야 함을 '충고'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저 '소식'을 전하고 믿으면 되는 기독교와는 그 구원의 주체가 다릅니다. 구원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 어려움은 예수님의 복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인간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기 쉽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단 종교는 바로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현혹하여 재산을 착취하고 그들의 삶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받거나 율법으로 돌아가는 교인들에 대해 화를 내며 그 어리석음을 경고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1:9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2-3

 

 

2.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신 예수님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밝히는 예수님이 오신 두 번째 목적은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앞에 언급한 율법의 멍에에서 속량 하기 위함이 소극적 차원의 구원이라면,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심은 적극적 차원의 구원입니다. 아들이 됨으로 얻는 기쁨과 능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양자 제도가 발달한 시대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는 로마의 시대로 양자 제도가 보편화되었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도 자녀, 특히 아들이 없던 귀족들이 많이 있었으며 아들이 있는 귀족도 평민이나 전쟁 포로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양자로 삼은 아들은 다른 자녀와 동일하게 부모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상속받았습니다. 유명한 벤허라는 영화의 스토리도 예루살렘의 귀족 벤 집안의 아들인 주인공이 함정에 빠져 노예가 되었다가 로마 귀족의 눈에 띄면서 양자가 되어 집안의 복수를 하는 내용입니다. 양자가 되면서 로마의 귀족이 가지는 권한을 그대로 가졌듯 양자는 실제 아들과 동일한 권한을 상속받았습니다. 

벤허는 1959년 제작된 대작으로 예루살램 귀족 집안의 아들인 주인공이 겪은 배신과 음모, 노예생활과 로마 귀족이 되는 등의 파란만장한 삶과 민족을 위한 애정, 신앙과 믿음까지 느낄 수 있는 영화임
영화 벤허의 한 장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에서 모든 권한을 함께 가지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영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습니다. 부르짖을 때마다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 이는 정말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세를 그대로 가지게 되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상속자

갈라디아서 본문 7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유업을 이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 유업을 잇고 또한 하늘의 복을 그대로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준비된 복을 그대로 받을 우리들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에서 받는 고난과 어려움도 이후에 이루어질 사명과 그에 따른 천국의 복을 바라보며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3. 마치며

성탄절이 중요한 이유를 예수님이 오신 두 가지 목적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하나는 멍에를 벗겨주시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명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시대로 전환하고 구원의 길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업을 함께 하고 그에 따른 복을 누리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고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결국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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