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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정신 건강/말씀과 적용

광야의 고난을 대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

by 아이언멘탈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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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애굽)의 노예로 힘든 삶을 살다가 모세라는 지도자에 의해 애굽을 탈출하여 그들의 조상들이 원래 살던 가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이 여정을 기록한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등장부터 광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나긴 고난과 축복의 여정이 지속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높이고 찬양하다가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죄악을 행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기 15:22-24

 

 

이스라엘 백성의 착각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착각은 출애굽만 하면 즉시 가나안에 입성하여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이 어디서 기인했나요? 생각지 않던 광야에서, 생각지 않던 시련과 궁핍에서 왔습니다. 광야의 생활은 한마디로 혹독한 연단의 생활이요, 긴장의 생활인만큼 심신이 고달팠던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있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이 질서가 하늘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안식하기 위해서는 고생의 땀과 노력의 땀을 먼저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함께 했으며, 여호와는 그들을 인도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인도함 속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원망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한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과정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그 백성인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방금 전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함으로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소고 치며 춤추며 노래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송축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광야 생활 때문입니다.

광야는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이 아닙니다. 광야는 또한 영원히 살 가나안도 아닙니다. 광야는 거쳐가는 땅, 정들 수 없는 세상입니다. 오직 고생과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이 광야에서 위대한 스승이요, 교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부패함을 지적하십니다. 구원이란 지극히 선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치시고 또한 반복된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시는 곳이 광야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아니 야곱의 후손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는 현장이 바로 광야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졌나요?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이해는 됩니다.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하고 간신히 마라라는 연못에 이르렀는데 그곳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이끌어 온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수르 광야에서 쓴 물을 먹어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마라 연못. 원망하는 백성과 다르게 모세는 기도했고 하나님의 지시로 나무를 던져 단물로 변하게 했음.
수르 광야에 있는 마라 연못 우물

 

 

모세의 기도

그러나 모세는 그를 원망하는 백성들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단 물이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의 인생 속에 마라의 쓴 물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만들어 주는 관문이 됩니다. 쓴맛을 알아야  단맛을 알 수 있습니다. 쓴 것을 모르는 혀는 단 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쓴 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단 줄을 압니다. 세상이 허무한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엘림의 축복으로 가는 하나의 필연적인 통로였습니다. 마라의 아픔은 하나님께서 더 큰 위험을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게 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은혜의 장소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즉 기도했더니 마라를 엘림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는데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이 해결책, 나무는 바로 예수 그리도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고침 받고,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 있는 사람을 소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인생 속에 던져져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라의 쓴잔을 마셔본 사람일수록 십자가 밑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 생명의 샘가에서 달콤한 생명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의 여호와는 우리를 기적의 치료로 고치십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인생 가운데 던지면 내 안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이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삶의 질병을 고치고 삶의 맛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마치며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전히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는 다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나아가는 다리입니다. 엘림은 마라를 극복하고 걸어온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의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엘림의 축복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마라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결코 마라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라에서 주저앉지 말고 엘림을 바라보면서 행군하시기 바랍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2024년 새해를 맞아서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환경은 코로나 이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마라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간절히 기도하므로 우리 모두가 엘림의 축복을 누릴 수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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